#1. 조붓한 공연장에 2대의 그랜드피아노가 나란히 놓여 있다. 일본 야마하(CFX)와 오스트리아 뵈젠도르퍼(280VC), 2억~3억원을 호가하는 고급 피아노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이 두 피아노를 번갈아 연주하고 소리에 대한 느낌을 얘기했다. 야마하뮤직코리아가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 야마하홀에서 진행한 두 피아노 시연 행사였다. 먼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과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 주제곡을 연주했다. “‘시네마 천국’ 같은 멜랑콜리하면서도 향수가 담긴 선율, 순수하고 애틋한 멜로디는 뵈젠도르퍼로 연주하면 천상의 소리가 나와요. 라흐마니노프 광시곡은 오케스트라의 크고 웅장하면서 풍부한 소리를 내야 하는데 여기엔 야마하가 좋았어요.” 임현정은 이어 가브리엘 포레의 ‘꿈을 꾼 후에’를 뵈젠도르퍼로 연주했다. “깨끗하고 순수한 멜로디 라인과 신비하면서도 비현실적인 반주가 공존하는 곡인데, 뵈젠도르퍼는 이걸 거뜬히 해내네요.” 다음엔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가운데 ‘사랑의 죽음’. “죽음의 드라마를 표현해야 하는 곡엔 야마하가 더 어울려요. 야마하에선 경험 많고 고생도 많이 해본 어른의 소리가 나와요.” 임현정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소감”이라면서도 “피아노도 저마다의 특질이 있다”고 했다.
#2. 지난 6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피아니스트 언드라시 시프의 리사이틀. 무대에 뵈젠도르퍼(280VC)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시프의 요구에 따라 미리 대여해 준비한 피아노다. ‘피아니스트들의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이 거장은 뵈젠도르퍼를 애용한다. 장장 4시간에 이른 이날 공연은 설명을 곁들인 ‘렉처 콘서트’였는데, ‘칸타빌레’(노래하는 듯이)가 열쇳말이었다. 그는 “모든 악기는 인간 목소리를 닮도록 애써야 한다”고 했다. 뵈젠도르퍼야말로 ‘노래하는 악기’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건반 반응이 즉각적이면서 정교해요. 공명은 놀랍도록 따뜻하고 투명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이 악기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바흐를 연주할 땐 스타인웨이를 더 많이 사용한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 음반에서도 곡의 성격에 따라 스타인웨이와 뵈젠도르퍼를 나눠 연주했다. “뵈젠도르퍼는 고음역에서 스타인웨이만큼 울림의 반향이 짱짱하지는 않아요. 음색이 전체 음역에 고르게 평준화되어 있지도 않고요. 스타인웨이가 산문적이라면 뵈젠도르퍼의 음색은 시적입니다.” 시프는 스타인웨이를 표준어, 뵈젠도르퍼를 사투리에 비유하기도 했다.
서울 예술의전당 음악당에 있는 피아노 12대는 모두 스타인웨이(D274)다. 롯데콘서트홀에 있는 피아노 4대도 스타인웨이다. 국내 대표적 클래식 공연장 피아노가 스타인웨이 일색인 것이다. 미국에 본사를 둔 스타인웨이는 ‘전세계 프로 피아니스트의 97%가 선택하는 피아노’라고 자랑한다. 물론 스타인웨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탁월한 피아노다. 하지만 스타인웨이의 ‘무대 독점’이 소리의 표준화, 음악의 다양성 상실로 이어질 위험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콩쿠르를 비판하며 획일화된 음악을 거부해온 시프가 뵈젠도르퍼에 주목하는 데엔 이를 경고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피아노가 연주장에서 공존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러시아 피아니스트 미하일 플레트네프는 6년 동안 피아노 앞에 앉지 않았는데, “현대 피아노의 음질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일본 제품 ‘가와이 시게루’ 피아노를 통해 ‘다른 소리’를 접한 뒤에야 피아노 연주를 재개했다.